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양호 대전 (문단 편집) == 전투 진행과정 == || [[파일:external/oi66.tinypic.com/33lld94.jpg|width=300]][br]파양호 대전의 양군의 교전도 || 주원장은 우선 호구(湖口)에 진을 치고, 그보다 후방인 경강구(涇江口) 및 남호자(南湖觜)에 복병을 배치하여, 진우량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한편 주원장이 당도하기도 하였고, 자신에 대한 포위망을 펼치는 모습이 보이자, 진우량은 남창에 대한 포위를 풀고 파양호로 나와 주원장과 결전을 벌이려는 모습을 취하였다. 어차피 주원장의 주력만 무찌르면 남창 정도는 언제든지 함락이 가능하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7월 20일, 양군은 강랑산(康郎山)이라는 곳에서 처음 조우하였다. 주원장은 부대를 열하나로 나누어 적을 막아내었다. 본격적인 교전은 다음날부터 이루어졌다. 7월 21일, 상류의 흐름을 타고 있는 진우량의 군세가 가히 하늘을 찌를 듯 했는데, 서달은 몸소 다른 장수들보다 앞장 서서 싸워 적의 선봉을 깨고 1500명의 적을 무찌르고, 적의 큰 배를 한 척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상우춘 역시 장수들을 이끌고 싸웠고,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가 가히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조용하던 파양호는 수십만 대군이 외치는 함성 소리로 가득찼다. 유통해(兪通海) 역시 군대를 지휘하며 화포를 사용해 진우량 군의 함선 수십여 척을 박살 내었다. 이때, 한군의 효장(驍將)[* 사납고 날랜 장수를 일컫는 표현] 장정변(張定邊)이 주원장이 타고 있는 함선을 발견하고, 바로 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모래사장이 있는 얕은 곳에서 배가 서로 뒤엉켜서 주원장은 엄청난 위기에 처했는데, 곁이 있던 상우춘이 화살을 쏘아 장정변을 물러나게 하고 벗어날 수 있게 했지만, 다시 얕은 곳에 걸려 들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때마침, 운 좋게도 패주하던 아군의 배를 발견하여 여기에 탑승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날 밤, 주원장은 진우량과 싸우고 있는 동안 장사성이 움직일 것을 염려, 가장 믿을 수 있는 서달을 남경인 응천부로 귀환시켜 장사성에 대비하게 하고, 나머지 장수들과는 진우량과 결전을 낼 준비를 하였다. 본래 이 싸움에서 주원장은 흰 돛대의 배를 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진우량은 다음날 전투에서는 돛대가 흰 배를 공략하기로 했는데, 이 정보도 주원장이 미리 파악하여 다른 배 역시 모두 돛대를 흰 색으로 칠해버렸다. 7월 22일, 아침 진시(辰)[* 7시에서 9시] 무렵, 진우량은 가지고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거함(巨艦)들의 엄청난 위용에 주원장 군단의 모든 장수와 병졸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사기가 꺾이자, 주원장은 직접 전선에서 지휘하면서 퇴각하거나 움찔하며 나아가지 않는 자들은 죽이면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러자 주원장의 모든 병졸들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서 결전하였고, 엄청난 대혈전이 벌어졌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입장이던 한군이 우세하였다. 또 주원장은 호상(胡牀)에 앉아 지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곁에 있던 유기가 펄쩍 뛰며 주원장에게 이동할 것을 재촉했고, 주원장은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다른 배로 이동하였다. 아직 주원장이 경황을 챙기지 못했을 때, 석포(石砲)가 날아와 주원장이 타고 있던 이전 배를 박살내었다.[* 명사 유기전의 기록이지만, 정확히 어느 날에 벌어진 사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7월 22일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으므로 이때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오시(午)[* 11시부터 오후 1시 무렵까지]를 넘기는 즈음이 되자 '''갑자기 동북풍이 불기 시작'''했다. 게다가, 진우량은 '''거함들을 쇠사슬로 연결'''하여(連鎖) 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에 주원장은 7척의 결사대를 뽑아 '''화약과 갈대를 실어, 바람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니 진우량의 함선들이 삽시간에 불에 타버리게 되었다'''. --이거 [[삼국지연의|어디]]서 [[적벽대전|많이 본 광경]] 아닌가?--[* [[나관중]]이 [[원명교체기|원말명초]]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파양호 전투는 그의 작품에도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파일:external/history.cultural-china.com/battle_of_bach_dang__mongol_invasiona9a584419bf961be508c.jpg]] 바람이 맹렬하고, 불길은 거세었고,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가득하니, 호수가 모두 붉은 빛이었다.[* 명사 태조본기.] 진우량의 군대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고, 주원장 군단의 장수들은 모두 신이 나서 북을 치며 가공할 공세를 가하였다. 진우량의 거함들에 비해 작았던 주원장의 함선들은 오히려 진가를 발휘해서, 기동력으로 한군을 괴롭혔다. 이미 지휘 계통이 마비된 한군은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했고, 주원장 군단은 수급을 잘라 확인한 숫자만 2천여 명이었으며, 불에 타서 죽고 물에 빠져 죽은 한군의 병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 싸움에서 진우량의 동생인 진우인(陳友仁)도 죽었는데, 진우인은 [[애꾸]]였지만 용맹하고 지략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제 진우량은 더 이상의 싸움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는 혜산(鞵山)으로 물러나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주원장이 미리 군대를 움직여 좌려(左蠡)등을 장악하고 파양호의 퇴로를 막아버려 도주조차 불가능해졌다. 이에 한군의 우금오장군(右金吾將軍)이 건의를 올렸다. >호수를 탈출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배를 불태우고 뭍으로 올라, 바로 호남으로 가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러자 한군의 좌금오장군(左金吾將軍)이 반론하였다. >이러면 우리가 약하다고 보이는 것이며, 저들이 보병과 기병으로 우리를 뒤쫓으면, 진격하거나 퇴각해도 의지할 바를 잃게 되어, 대사를 잃게 됩니다. 진우량은 한참을 갈팡질팡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우금오장군이 말한 대로 행하려고 했지만, 그러자 좌금오장군이 주원장에게 항복해버렸고, 그 모습을 본 우금오장군마저 항복해버렸다. ~~도대체 어쩌라고~~ 형편없어진 진우량에게, 주원장은 자신의 서신을 보내왔다. >나는 공과의 약속을 따르고자 하여 각자 일방(一方)을 편안케 하며 천명을 기다렸소. 공이 실계(失計)하고 방자하여 그 독이 나에게까지 미쳤소. 나는 군대를 가벼이 해 그 틈을 빠져나왔으나, 문득 공은 용흥(龍興) 11군을 차지하였으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후회하여 뉘우치지 않고, 또다시 병화(兵禍)의 단서를 만들었소. 한 번에 홍도(洪都)에서 곤궁해졌고, 두 번째는 강랑산에서 패하였으니, 골육과 장사(將士)들은 거듭 도탄에 빠졌소. 공은 다행히 살아 돌아갔으니, 또한 의당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진정한 주인을 앉아 기다려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가속을 잃고 일족이 멸할 것이니, (그때는) 후회해도 늦소. 이 편지를 본 진우량은 [[멘붕]]하여 잡아놓았던 [[포로]]들까지 모조리 학살하며 발광하였다. 이에 비해 여유가 넘치게 된 주원장은 오히려 잡은 포로들을 놓아주고 잘 대해주고, 죽은 사람들의 친척들에게 조문을 하면서 대조를 이루었다. 대치가 이어지던 8월 26일, 마침내 한군의 식량이 바닥이 났다. 진우량은 최후의 발악을 위해 백 척의 전함을 이끌고 호수 입구로 돌진하여 포위를 뚫으려고 하였고, 기다리고 있던 명나라 장수들은 진우량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진우량 부대는 살아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만, 오히려 해가 저물 때까지 마치 늪에 잠식당하듯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혼란하고 절망스러운 전투의 와중에, 군대를 지휘하던 진우량은 유시(流矢)에 맞아 [[헤드샷|눈과 머리를 관통당하고 즉사했다.]] 한군은 모조리 괴멸당하고, 태자였던 진선아(陳善兒)는 사로잡혔으며, 이 싸움에서 주원장을 위협했던 장수인 장정변만이 진우량의 둘째 아들 진리(陳理)와 진우량의 시신을 가지고 무창으로 탈주하는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